어떠한 수식어도 필요 없다. ‘좌완 선발 20승’이라는 단순한 단어 나열이 이토록 멋있을 수가 있는가. 막연히 부러울 수가 있는가. 우리의 희망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 바로 이상훈이 해낸, 우리에게는 기록 이상의 감동 그리고 추억으로 남아있는 1995년의 이야기다. ‘자존심을 세워달라’며 프로 입단 당시부터 구단과 치열한 계약금 다툼을 벌이던 이상훈. 그러나 이상훈은 끝내 구단의 의사를 수용하며 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2억 원(계약금 1억 8,800만 원, 연봉 1,200만 원)이라는 몸값에 꿈에 그리던 LG 트윈스에 입성한다. 데뷔 첫 해인 1993년 9승 9패 평균자책점 3.76을 기록하며 아쉽게 두 자리 승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고, 플레이오프 3차..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출신으로 한국 프로야구 원년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우승은 물론 투수 3관왕, 그리고 초대 MVP까지 휩쓸었던 당대 최고의 투수 박철순. 물론 원년의 맹활약에 이어 그 이후의 프로 생활은 부상과 재기의 연속으로 힘겨운 선수 생활을 거듭하면서 최고의 선수라기보다는 ‘불사조’라는 이미지가 더 어울리게 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박철순은 1982년 이전에도 순탄한 인생을 보낸 적이 없었을 만큼 격랑의 인생을 보냈던 선수였다. OB 베어스 입단 이전의 박철순의 행보를 다시 되돌려보자. 파란만장 인생사 박철순 박철순의 고향은 부산이다. 부산에서 초등학교 시절, 뒤에 롯데 감독이 되는 김용희 해설위원과 선수 생활을 함께 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용희가 고려대 74학번이므로 박철순도 74..
데뷔 이후 다섯 시즌동안 평균 220이닝을 던지며 20승씩을 챙겨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통산 100승을 달성한 투수. 특히 그 사이에 두 차례나 선발 20승을 기록했던 역사상 유일한 투수이며, 김수경과 조용준을 비롯한 수많은 대투수와 신인왕을 길러낸 당대 최고의 투수 지도자 김시진. 그러나 김시진이라는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최고의’, 혹은 ‘위대한’ 같은 수식어가 아니다. ‘비운’이나 ‘2인자’, 혹은 ‘3인자’니 하는 비루한 꼬리표들이다. 그렇다. 그의 이름은 자연스레 최동원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고, 그것은 또다시 선동열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런 연상의 출발점은 아마도 1981년 실업야구 코리안 시리즈였을 것이다(프로야구가 개막하기 전, 실업야구도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
‘국보급 투수’의 화려한 등장, 1986년 선동열 한국 축구가 차범근, 한국 농구가 허재라면, 한국 야구는 선동열이다. 다시 말해 선동열은 곧 한국 야구였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로 한·일 야구 20년을 평정한 진정한 에이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아시아 야구 역사를 다시 쓴 이가 선동열이었다. 1980년, 빚고을 광주가 뒤숭숭하던 그때 그 시절, 훗날 국보(國寶)라 불리는 투수 하나가 등장했다. 중학교 때 이미 130km/h 중반, 고등학교 때 140km/h 후반대의 구속을 던졌던 선동열은 자타공인 ‘괴물’이었다. 먹는 게 부족하고 관리가 허술했던 30년 전 야구 환경을 생각해 볼 때, 선동열은 타고난 투수였다. 광주일고 3학년인 1980년에는 첫 전국대회였던 대통령배에서 에이스 겸 5번 타자로 출장해..
1989년, 최동원이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 앞으로도 뒤로도 야구장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어색한 풍경이었다. 하늘색 삼성 유니폼은 마치 얻어 입은 것처럼 겉돌았고, 최동원이 빠지고도 롯데 자이언츠를 여전히 ‘롯데 자이언츠’라고 부른다는 사실 또한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마다 연봉 협상에서 몇십만 원 되지도 않는 돈을 놓고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질려버린 데다가 선수협회 결성을 주도하며 미운털까지 박힌 골칫덩어리를 치워버리고 싶었던 롯데와, 어떻게든 우승을 하려면 최동원 같은 근성과 투지의 에이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삼성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4승 투수’ 최동원과 ‘최초의 100승 투수’ 김시진이 맞바꾸어지는 초대형 트레이드..